순천은 예로부터 소강남 또는 삼산이수의 아름다운 고장으로 물이 좋아 미인이 많기로 이름 나 있다
동부 전남의 중심지 그래서 전남 지방에서는 흔히들 순천에 가거들랑 인물 자랑은 말 것이며, 여수에 가서는 돈자랑을, 벌교에 가서는 주먹자랑을, 광양에 가서는 노래자랑을 하지말라고 각고을의 특색을 말하고 있다.
험한 계곡속에 숱한 명승사찰을 지닌 소백산맥은 순천에 이르러 발길을 멈추면서 확트인 평야를 형성한다.
이같은 좋은 여건대문인지 순천은 해방전까지만해도 조선팔도에서는 황해도 안악 다음으로 지주가 많았다는 지주계급의 고을로도 손을꼽았다. 이 때문에 지주와 소작농과의 소작료를 둘러싼 시비도 잇달아 벌써 1920년대에 소작쟁의가 일어나기도 했다는 것.
멀리 고려때부터 이 지방에는 명문들이 자리를 잡아 成 黃 裵 蔡등 4성의 大姓을 이루었다하나 지금은 이조중엽에 이곳에 이주한 趙 鄭 梁등 4성이 토착씨족으로 큰 문중을 이루고 있다고 하고 승주군 주암면을 중심한 玉川趙氏는 이 고장의 가장큰 씨족. 순천 승주를 합해 3000여가구들 헤아린다.
고려말 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근 학자로 이름을 떨쳤고 벼슬이 六典農副正까지 올랐던 玉川趙 瑜의 후손들이다.
趙瑜는 이태조가 등극하자 홀연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순창에 내려와 살다가 만년에는 오늘의 승주군 주암면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이태조가 그를 아껴 港城府尹의 벼슬까지 내리고 여러차례 불렀지만 두임금을 섬길수 없다하여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는 것.
瑜의 아들 崇文과 손자 哲山은 사육신과 모의 단종의 복위운동을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돼 뜻을 펴보지 못한채 부자가 함께 참형을 당한 충신들이다. 후에 崇文에게는 節愍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주암에 있는 謙川원에 나란히 配亨했다.
이 문중은 최근세에 와서 각계에 많은 인물을 내놓았다.
제헌의원을 지낸 趙玉鉉씨(작고)를 비롯, 일제때 임정요원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섰고 5.16후 6대 국회의원을 지낸 趙○韓, 5대,8대국회의원을 지낸 趙淵夏등은 정계에 진출했던 이집안의 두드러진 인물. 특히 학계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 한국과학원장으로있는 趙淳卓박사 趙淳昇(在美)형제와 趙淇善박사(在美) 趙淳炅박사(在美) 趙淳圭박사( 在美) 趙明勳박사(在獨)등 박사가 수두룩하다.
주암면에서 두차례에 걸쳐 대의원으로 있는 趙洪○ 順天鄕校의 전교를 지냈고 순천향교 복구에 공이 많은 趙昶烈 순천상공회의소회장겸 세진기업사장으로 있는 趙圭(言旬)등은 향리를 지키고 있는 이 집안 사람들이다.
[조씨 문중 비주 광화주] 물대신 술에 술밥을 넣어 아홉번을 거듭하여 빚는다는 광화주는 이집안 비방의 술로 한번 맛을 보면 그 감칠 맛이 가히 신선주를 능가한다는 일화가 있기도... 이 집안은 대대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선행이 잇달아 조규순씨의 고조부인 趙鎭龍때 조정에서는 서울 남대문에 `四面春風 趙鎭龍`이란 방을 써붙여 이 집안의 적선을 널리 일반에게 알린일도 있다고 한다
현재 조규순씨가 살고있는집은 그의 10대조가 지은 전통적인 한옥으로 4백여년을 이어오면서도 옛모습을 하나도 잃지않고 있어 이가문의 또다른 자랑으로 삼고 있다. <鄭鎭起기자>